조선후기 유학자 이제마 한의학

 조선의 한의학은 조선 초기 '의방유취'를 통해 일차적으로 방대한 자료의 수집 단계가 있었고, 조선 중기 광해군 때 허준의 '동의보감'으로 한 번의 일단락이 있었다. 중국을 포괄하는 동아시아권에서 '동의보감'이 나온 시기까지의 의서를 통털어 보았을 때 '동의보감'보다 나은 놈 손들고 나와봐...했을 때 나올만한 놈 거의 없다가 정답이다.
 엄청나게 방대한 양의 자료를 인용하고 모아 놓았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일종의 가정의학 대백과처럼 쓸 수 있게 백과사전식 형식을 취했다. '원전'과 '주석'이라는 독특한 문화 코드를 감안한다면, 허준은 적어도 유불도가의 철학에 최소한 어느 정도 이상의 경지를 이룩한 상태였음에 틀림 없고, 의학분야에서 그 철학의 바탕 위에서 도달한 경지는 역대 중국의 어느 의가와 비교해도 뛰어나면 뛰어났지 떨어지지 않았다. 혹자는 '동의보감'이 거의 인용문으로 구성된 편집식 백과사전에 불과하다고 폄하하고, 혹자는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라고 무시하지만 상당히 안타까운 반응이라고 생각된다.

 굳이 조선의 한의학에서 중기까지를 하나로 일단락 짓는 것이 필요한 것은 중국 역사의 흐름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명청 교체기라는 시기는 동아시아 철학사적으로 봤을 때, 이 시기를 전후로 유학에 한 차례 변화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변화는 과거의 위대한 거인의 유산과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 싸움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펼친 사람이 바로 이제마이다. 동의보감이 중국 명대까지, 조선 중기까지의 집대성이라고 볼 수 있고 조선의 어의들은 그 이후로도 동의보감을 다시 압축해가는 작업에 더해 그 빈 곳을 명말청초의 중국 의학 일부를 받아들여 수정하는 작업에 매달려 있었다. 이제마는 이러한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거인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사대부들의 유학은 사실은 송유(宋儒), 즉 신유학(neoconfucianism)이다. 공자와 맹자가 원시 유가라면 주희, 정자 등을 태두로 하는 새로운 유학의 부흥을 이끌어낸 송명대의 유학이 바로 신유학이고 이것이 조선의 유학이었다. 공맹은 성인의 경지로 취급 받고, 주희(주자)는 그와 비슷한 수준 또는 조금 아래의 현인 또는 지인으로 취급 받는데 어쨋거나 조선의 선비들에게 있어 주자는 untouchable의 giant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기대승, 이황, 이이 등 기라성 같은 조선의 지성들이 모두 주자의 유학의 범위 안에서 서로 맞다 틀리다를 놓고 그렇게 박터지게 싸웠으니 말이다.

 주희가 거인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것은 그 역시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기 때문이다. 한, 당의 유가는 공맹의 원시 유가가 완전히 도가와 불가에 의해, 특히 불가에 의해 개박살이 나서 그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는데, 찬란하게 등장한 주희는 도가와 불가를 유가에 흡수하는 과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도가와 불가의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변들을 유가의 인문주의적 논설 안에 품는 새로운 발상을 시도했고, 그것을 흔히 경학(經學)이라고 부르는...공맹의 가르침(사서, 오경 등을 일컬음)에 대한 주석 작업을 통해 해냈다. 인간의 현실적 삶 및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한 빈틈 없어 '보이는' 체계를 구성해냈다는 것에서 그는 거인이었다.

 그런데 명을 지나고 청을 향해 가면서, 조선에서는 중기를 넘어서면서 주자학은 비판을 받게 된다. 그것은 사실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불안한 불씨가 터져나온 것에 다름아닌데, 도가,불가의 형이상학적인 논변들을 원시 유가의 철저하게 인문주의적 텍스트 안에 억지로 녹인 그의 구도 자체에 대한 불신이 조금씩 일어난 것이다.

 이쯤되면 당연히 중국은 중국대로, 조선은 조선대로 그 반발 양상이 달랐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는데, 중국에서는 '왕부지' 등을 필두로 하여 理, 氣 중 氣만을 강조한 일종의 유물론의 방향으로 그 반대의 방향을 잡았다. 이에반해 조선에서는 '유물론'과는 사실상 정반대의 방향에 위치했던 하나의 거인이 있었으니 그는 조선의 3대 천재 중 한 명이라는 정약용이다. 
 
 정약용의 대단한 점은 주희의 성리학, 즉 理氣論에 대한 반박을 역시 공맹의 가르침에 대한 주석을 통해 이루었고, 그 와중에 중국의 유물 기일원론 철학의 입장과는 반대인 心을 강조한 그만의 철학 체계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이 때 그가 강조한 心(마음)은 양명학에서 말한 심즉리의 그것과는 구분되어야 하는 하나의 일관된 철학 체계 속에서의 心이었다. 그는 주희의 성즉리로서의 성리학에서의 理氣설을 완전히 해체해버리고, 새롭게 구축한 체계 속에서 인간의 마음의 중요성을 철저하게 강조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이제마는 정약용과 거의 같은 위치에 서서 유학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정통으로 유학을 교육받은 사람이었고 관리였다. 그의 관심은 인간과 그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원시 유가가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좌표였고, 그 역시 정다산과 마찬가지로 주희의 신유학은 인간과 세계로부터 벗어나 우주와 자연을 포괄하려는 시도 속에서 중심을 잃었다고 보았다. 그의 원시 유학에 대한 이해의 깊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經學이 아닌 보다 인간에게 가까운 방향에서 자신의 철학을 말하고자 하였고 그것이 바로 의학이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사상의학'이라고 불리는 '동의수세보원'이다. 이 때의 4는 혹자는 주역의 태극-양의-사상으로부터 나왔으니 주역에 기본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의 척학적 바탕을 고려한다면 맹자의 四端, 四德을 보다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어쨋든 중앙의 마음(心)의 자유의지(free will)를 강조하고 나머지 폐비간신 사장을 별도로 분석하면서 기존의 의학 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마음(心)을 특별히 분리한 것은 다산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발전 끝에 나온 성리학 자체에 대한 파괴와 새로운 패러다임, 즉 원시유학에 대한 조선적 해석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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